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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생각

아내와 함께 했던 첫 한국행에서의 기억

by 미국 사는 한국 공대생 2020. 9. 27.

그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한지 1년.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던 아내는 나와의 한국 여행에 무척 설레고 있었다. 매 연말이면 한국에서 2주-3주의 휴식을 취하고 오는 당시 유학생이었던 나를 따라 만난지 4개월만에 함께 예약했던 비행기와 숙소.

"넌 내가 한국에서 어떤 사람일지 알고 따라와? 안무서워?" 라는 나의 그냥 던지는 질문. 이상한 사람이면 엄마아빠한테 이르겠다는 아내. 사실은 나를 믿고 따라가겠다는 아내(당시는 여자친구)가 고마워서 던진 질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여자친구, 남자친구 관계였고,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도 처음 만나는 날이었기에 무작정 우리 집에서 머무르라고 하기도 어렵고, 아마 그랬다면 모두가 다 불편했을 때. 그랬을 사이.

광명에 사는 나는 서울에 친구도 없고, 가족도 거의 없는 아내를 신논현역 교보문고 뒤 깨끗한 호텔에 머물게 했다

강남역의 활기찬 매일매일, 그리고 우리집에서도 20분-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어차피 매일 데이트하면 강남역에서 출발해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강남의 호텔을 정했었던 모양이다 (사실은 내가 활기차고, 사람 가득한 거리를 좋아한다)

그렇게 여자친구, 남자친구 사이였던 우리의 첫 한국행이 시작되었다

여자친구를 위해 (사실은 나를 위해) 서울 이곳 저곳, 제주도 등 데이트 계획을 미리 준비하였고, 하루하루 추운 날씨였지만 그리고 시차 적응으로 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계획했던 목적지를 마치 게임 퀘스트를 정복하듯 바쁘게 돌아다녔고, 한국의 냄새, 북적북적한 거리, 대중교통이 그리웠던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어색했지만 꽤나 새롭고 재밌었던 우리 가족과의 첫 만남도 잘 마치고.


2018년 12월 31일

연말. 한국의 연말은 항상 북적북적하고, 활기차다

그에 반해 다들 조용히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는지 (아님 나만 초대가 안된건지) 조용한 미국의 연말

그런 복잡스럽고, 살아있는 느낌의 한국에서의 연말.

연말 저녁은 가족과 보내겠다는 나의 말에 조금은 아쉬워보였지만 낮에 대신 재미있게 데이트 하자는 아내.

우리는 이른 시간에 만나 삼청동 거리에 도착했다. 네이버 리뷰 점수가 꽤나 높은 칼국수, 만두 집에서 뚝딱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 데이트를 시작한 우리. 미국에서는 특히, 그 당시 살고 있던 조지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데이트. 여기 저기 걸어다니면서 예뻐보이면 살짝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도 한 번 쓱 훑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북촌한옥마을 동네에 이르렀다 (주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동네가 너무 예뻐서 구경하러 가게 되는 곳)

삼청동에서의 계절은 추웠지만, 그 시간은 따듯했던 기억.

골목골목 예쁘게 줄지어 빽빽하게 자리잡은 한옥집들 사이에서 사진도 남겨보았다

좁은 골목길들이 더 안정감을 주는 것 같은건 아마 한국에 오랜만에 간 탓이겠지. 

아무리 오랜만에 왔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우리는 한국 사람이던가. 이렇게 빽빽하게 가득한 집들, 건물들이 괜스레 겨울을 따듯하게 안아주고 있는 느낌.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처음 보는 미용실에서 조차 갬성을 느끼고. 크게 신경쓰지 않은듯 하지만 괜히 클래식해보이고, 조화가 잘 되는듯한 외부 인테리어 색감에 사진기를 들어본다. 오래 되어 보이는 건조기에 널려있는 수건들. 왠지 나도 모르게 어떤 냄새가 날지 알 것만 같지만 미용실의 세월이 색과 냄새에 고스란히 베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미리 검색해두었던 전통 차와 다과를 먹을 수 있는 전통찻집에 들러본다

따듯함을 주는 삼청동, 북촌한옥 마을이라고 왜곡되었을지 모르는 기억을 위에 남겼지만, 추운건 어쩔 수 없었기에 손님이 많은 전통찻집 대기 리스트에 이름 석자를 적고, 겨우 두 자리 비어있는 난로 근처 대기석에 딱 붙어서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려본다

밖에서 기다리는 초조하고, 추워보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넓은 통유리창 속 사람들은 좌식 테이블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정말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한 입 크기의 다과를 조금씩 깨물어 먹고 있었다. '그래 우리도 들어가면 꼭 저렇게 여유롭게 있다가 나오자'라고 생각하며, 처음 경험해볼 전통 찻집에 앉아있는 우리를 상상하는 나.

하지만, 우리 앞 대기 손님들 이름도 전혀 불리지 않는 느낌.

그렇게 얇은 통유리창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마음으로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언제 들어갈지 모르는, 아니 들어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괜히 불안하기만 하고. 어느덧 내가 가야할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전통찻집 통유리창 밖에서 난로만 쬐다가, 부러워만 하다가

"에잇 뭐 차가 거기서 거기지"하며 괜히 퉁명스럽게 자리를 뜬다. 자리를 뜨기 전, 사실은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에 사진을 남겨본다

그렇게 우리의 12월 31일. 처음으로 함께 다녀온 춥지만 따듯했던 삼청동, 북촌한옥마을 데이트를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랜 미국 생활 탓에 따로 만날 친구도 없고, 그래서 약속도 없는 여자친구를 연말 저녁 데이트하는 커플들로 가득한 강남 한복판 호텔에 데려다 놓았던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자친구와 나의 미래에 관해 가족들과 따로 이야기할 시간도 필요해 미리 잡아두었던 가족 식사. 얼른 식사를 하고 여자친구랑 연말 보내라고 아빠의 말을 들을걸 했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도 다 알고 있지만, 난 그 날 저녁을 먹고 뻗어버렸다)

후에는 우리 집 바로 옆 호텔로 숙소를 옮겨 우리 가족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오랜 시간, 편하게 데이트 할 수 있었다

배려심 많고, 순수했던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와 함께 했던 한국행은 아마 따듯하고, 아기자기하게 오래오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2020년 9월 26일. 점심 12시. 미국 한복판 어느 조용한 시골 동네.

지금은 결혼을 하고,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아내가 강아지와 함께, 내가 앉아 타자를 두들기는 테이블 맞은 편 쇼파에 누워 토요일 점심 낮잠을 즐기고 있다. 역시나 여유롭고, 따듯할 하루. 일어나면 나가서 근처 카페나 가보자고 해야겠다